각 시대의 대쟁투

제 14 장 영국에서의 복음 전파

루터가 그동안 닫혀 있던 성경을 독일 백성에게 열어 주고 있는 동안 틴들(Tyndale)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영국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위클리프가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였으나 그것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다. 또한 그것은 인쇄되지 않은 필사본이었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싸서 부자나 귀족이 아니면 가질 수도 없었다.

1516년 곧 루터가 95개조를 공포하기 일 년 전에 에라스무스가 헬라어와 라틴어 신약 성경을 발행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원어로 출판된 것이었다. 이것으로 이전 번역판들의 많은 오류가 교정되었고 그 의미도 훨씬 분명해졌다. 이 성경은 교육받은 이들에게 진리의 지식을 더욱 잘 전달해 주었으며 개혁 사업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부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자기 나라의 백성에게 성경을 보급하여 위클리프의 사업을 완성시키고자 한 사람이 바로 틴들이었다.

근면한 학도요 열렬한 진리의 탐구자였던 그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깨달은 바를 두려움 없이 전파하였고, 모든 교리는 성경에 비추어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가 성경을 주었기 때문에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대하여 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기는커녕 우리에게서 성경을 감추어 버렸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화형시킨 자들이 바로 당신들이다. 당신들은 할 수만 있으면 성경 자체를 불살라 버릴 것이다.”

틴들의 설교는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신부들은 그의 사업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틴들은 부르짖었다. “내가 한 곳에서 씨를 뿌리고 있는 동안 원수는 이미 씨를 뿌린 밭을 망가뜨려 버린다. 나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말로 된 성경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궤변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없이는 일반 신자들을 진리 안에 굳게 세울 수 없다.”

그리하여 새로운 목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그는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시편을 낭송한 것은 이스라엘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국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낮인데도 교회가 새벽빛보다 더 희미한 빛을 가져서야 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성경을 반드시 자국어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논쟁한 어떤 학식 있는 가톨릭교인은 “우리는 교황의 율법을 버리기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틴들은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율법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보전해 주신다면 나는 수년 내에 밭을 갈고 있는 소년이 당신보다 성경을 더 잘 알게 만들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틴들이 신약 성경을 번역함

모국어로 된 신약 성경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결심한 틴들의 목적은 한층 더 굳어졌다. 그는 곧 그 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 런던으로 갔다. 그는 얼마 동안 그곳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그의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핍박으로 다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전역이 그를 배척하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는 독일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거기서 그는 영어 신약 성경의 인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두 번이나 정지당하였으며 그는 이 도시에서 인쇄할 수 없으면 저 도시로 가고 저 도시에서 인쇄할 수 없으면 또 다른 도시로 갔다. 마침내 그는 보름스로 옮겨 갔는데 그곳은 몇 년 전에 의회 앞에서 루터가 복음을 옹호한 곳이었다. 이 도시에는 개혁 사업에 함께하는 친구들이 많았으므로 틴들은 더 이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곧 3천 부의 신약 성경이 출판되었으며 이어서 두 번째 판이 인쇄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리에 런던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필사적으로 진리를 억압하고자 하였으나 헛된 일이었다. 한번은 더럼(Durham)의 감독이 성경을 판매하는 틴들의 동료에게서 성경을 모두 사 버렸다. 그는 그 성경들을 사서 없애 버림으로 개혁 사업을 크게 방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감독이 낸 돈으로 새롭고 더 좋은 신판 성경을 낼 수 있는 재료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틴들이 체포되었을 때 그는 성경 인쇄를 위한 비용을 제공한 사람의 이름을 알려 주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더럼의 감독이었다고 대답하였다.

틴들은 배반자들에 의해 원수들의 손에 잡혔고 여러 달 동안 감옥에서 고생하였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순교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마련해 준 무기는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통하여 복음의 군병들이 계속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래티머(Latimer)는 성경을 자기 나라의 말로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설교단에서 주장하였다. 그는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며” 성경은 그 저자의 능력과 영원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어떤 왕이나 황제나 장관이나 통치자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의무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곁길로 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뒤를 따르거나 그들이 행한 대로 하지 말고 그들이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틴들에 이어 그의 친구 반스(Barnes)와 프리스(Frith), 리들리스(Ridleys)와 크랜머(Cranmer)가 일어나 영국의 종교 개혁을 이끌었다. 그들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가톨릭교회에서 열성과 경건으로 크게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황청의 잘못을 알게 된 후 교황권에 반대하게 되었고 큰 능력으로 그에 항거하는 증언을 하였다.

오류가 없는 성경의 권위

영국의 개혁자들이 주장한 위대한 원칙은 왈덴스인들과 위클리프, 얀 후스,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그들과 연합했던 동지들이 주장한 원칙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되는 절대 무오의 성경의 권위였다. 그들은 성경으로 모든 교리와 주장들을 시험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그 거룩한 사람들로 하여금 화형주에서 그들의 생명을 기꺼이 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래티머는 불꽃이 그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의 음성을 침묵시키고자 할 때 이렇게 외쳤다. “안심하라.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우리는 영국에서 결코 꺼지지 않을 촛불을 켜게 될 것이다.”

콜룸바(Columba)와 그의 동역자들이 스코틀랜드에 뿌린 진리의 씨 역시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영국의 교회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에 복종한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스코틀랜드 교회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에 가톨릭교회가 이 나라에 확립되자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욱 짙은 암흑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광선은 어둠을 뚫고 들어갔다. 영국에서 성경과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가지고 온 롤러드파(Lollards)는 복음의 지식을 보존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종교 개혁이 시작되자 루터의 저서들과 틴들의 영어 신약 성경이 전해졌다. 이러한 저서들은 조용히 산과 골짜기들을 넘어 전파되었으며 스코틀랜드에서 거의 꺼져 가던 진리의 등불을 다시 밝혀 주었다. 그리하여 4백 년간 로마 교회의 압제하에 이루어진 일들을 모두 무너뜨렸다.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업이 위협받게 된 것을 깨닫자 즉시 스코틀랜드의 가장 고귀한 사람들 중 몇 사람을 화형에 처했다. 죽음을 무릅쓴 순교자들은 강력한 진리의 증인이 되어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로마 교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존 녹스(John Knox)

해밀턴(Hamilton)과 위샤트(Wishart)는 좋은 가문에 고상한 인품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으나 겸손한 제자들과 함께 화형주에서 그들의 생명을 마쳤다. 그러나 위샤트의 화형주로부터 불꽃으로도 침묵시킬 수 없는 사람 곧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스코틀랜드에서 로마 교회의 세력을 몰아낼 한 인물이 등장하였다.

존 녹스(John Knox)는 로마 교회의 전설과 신비주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였다. 위샤트의 가르침을 통해 그는 로마 교회를 떠나 박해받는 개혁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는 동료들로부터 복음을 전하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그 책임의 중요성을 느끼고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주저하였다. 여러 날을 번민한 후에 그는 이 일을 수락하였다. 일단 그 제안을 받아들인 후에는 확고한 결심과 불굴의 용기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전진하였다. 이 충성되고 열렬한 개혁자는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여왕과 직접 대면했을 때 녹스는 여왕의 호의에 매수당하지 않았고 위협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여왕은 그가 국가에서 금지하는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그로 인해 권세에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녹스는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들이 오랫동안 예속되어 있던 바로의 종교를 받아들였다면 이 세상에는 어떠한 종교가 남아 있겠습니까? 혹은 사도 시대의 모든 사람이 로마 황제의 종교를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이 세상에는 어떠한 종교가 전해졌을까요?”

메리 여왕은 말하였다. “너는 성경을 이런 의미로 해석하고, 그들(로마 가톨릭교회)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며, 누가 올바른 판단을 해 주겠는가?”

개혁자는 대답했다. “여왕 전하께서는 성경이 밝히 보여 주는 하나님을 믿으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분명합니다. 만일 애매한 부분이 발견되면 하나님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 성령께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점을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개혁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왕 앞에서 그와 같이 진리를 전하였다. 그는 이러한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스코틀랜드가 가톨릭교회로부터 해방되는 날까지 거룩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영국은 개신교를 국교로 삼은 결과 박해의 세력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대부분 폐지되었으나 그 형식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개신교는 교황의 절대권을 부인하였으나 그 대신 국왕이 교회의 머리가 되었다. 교회 예배는 여전히 복음의 순결성과 단순성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종교의 자유의 대원칙도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국왕들은 로마 교회가 자행한 그러한 잔혹한 일은 하지 않았지만 각 사람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국교가 정한 교리를 인정하고 그 예배 형식을 준수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 그 결과 국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수백 년에 걸쳐 박해를 받았다.

많은 목사가 추방당함

17세기에는 수천 명의 목사가 추방당하고, 사람들은 교회가 인정한 것 이외의 어떠한 종교 집회에도 참석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했다. 박해받는 주님의 자녀들은 깊은 숲속의 은신처에 모여 기도와 찬양으로 그들의 심령을 토로하였다. 많은 사람이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 감옥은 가득 찼고, 가족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핍박이 그들의 증언을 침묵시킬 수는 없었다.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추방된 사람들은 그곳에서 정치와 종교의 자유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죄수들이 가득한 옥중에서 존 버니언(John Bunyan)은 하늘의 분위기를 호흡하였고 멸망의 세상에서 천국 도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여행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썼다. 그가 저술한 『천로역정』과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는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했다.

영적 암흑시대에 화이트필드(Whitefield)와 웨슬리(Wesley) 형제는 하나님의 빛을 전하였다. 당시 영국 사람들은 국교회의 통제 아래 이교도와 거의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으로 쇠퇴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상류 계급은 경건한 삶을 냉소하였고 하류층 사람들은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교회에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진리의 사업을 일으킬 용기와 믿음이 없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루터가 그렇게도 분명히 가르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톨릭교회의 교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화이트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올바르게 살면서 교회의 규정을 준수함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침 받아 왔다.

한번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병이 들어 죽음의 위기를 느꼈을 때 그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의 기초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대답하였다. 질문을 한 친구가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나의 행함과 노력이 구원의 소망을 얻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나의 노력을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달리 신뢰할 만한 것이 없다.” 교회를 덮고 있는 암흑이 그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구원의 유일한 소망 곧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피에서 멀리 떠나 있었던 것이다.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은 참신앙은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은 말과 행동은 물론이요 생각에까지 미친다고 여겼다. 그들은 근면하고 경건한 노력으로 육신의 악을 극복하고자 애를 썼다. 그들은 극기와 겸비의 생애를 살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 주는 성결한 삶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모든 방법을 매우 엄격하고 정확하게 준행하였다. 그러나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죄의 세력을 깨뜨리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개신교의 설교단에서 거의 꺼져 버린 거룩한 진리의 불꽃은 보헤미아의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여러 세대 동안 전하여 내려온 횃불로부터 다시 밝혀져야 했다. 종교 개혁 후에 보헤미아의 개신교는 로마 교회의 세력에 여지없이 짓밟혔다. 그리하여 진리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더러는 작센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신앙을 보전하였다. 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웨슬리는 빛을 받았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 사업을 위하여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모라비아 교도들과 일행이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그들은 항해 중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존 웨슬리는 그때 자신이 아직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에 이 독일인들은 자기가 맛보지 못한 신뢰와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들의 행동이 매우 진실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매일 어떠한 장애를 만날지라도 동요되지 않는 평온한 태도를 나타내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밀치거나 매로 때리거나 넘어뜨리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서 조용히 나갔으며 한마디 불평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번은 그들이 진정으로 교만과 분노와 복수의 정신은 물론이요 공포심에서 벗어났는지 그 여부를 시험해 볼 기회가 왔다. 그들이 예배를 시작하며 시편을 노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바다가 거칠어지고, 큰 돛이 찢어지고, 파도는 배를 삼키려는 듯이 갑판 위를 휩쓸었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놀라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독일인들은 조용히 시편을 계속 노래하고 있었다. 후에 나는 그중 한 사람에게 ‘당신들은 무섭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또 ‘그러나 부인들과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아니요. 우리의 부인들과 아이들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웨슬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

영국으로 돌아온 뒤 웨슬리는 한 모라비아 전도자의 지도로 성경이 말해 주는 신앙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지 말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온전히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런던에 있는 한 모라비아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루터의 글이 낭독되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웨슬리의 마음속에 믿음이 불타올랐다. 그는 말하였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내 자신까지도 가져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기도와 금식과 극기로써 얻으려 애썼던 은혜가 실상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지식을 어느 곳이든지 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그는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라고 생각한다. 어느 곳에서든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엄숙한 의무라고 여긴다.”

그는 엄격한 극기의 생애를 계속했는데 그것은 이제 신앙의 근거가 아니라 결과요 성결의 기초가 아닌 열매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가 받은 위대한 진리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능력,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는 생애에 맺히는 열매 등에 관한 진리를 전하는 일에 삶을 바쳤다.

화이트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대학 시절에 경건치 않은 동료 학생들로부터 ‘메서디스트’(Methodists-규칙 준수자)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받았는데 오늘날에는 그 호칭이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도록 그들을 강권하셨고 수천 명의 사람이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였다. 그리하여 약탈하려는 이리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고, 웨슬리는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감리교(Methodist Connection)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조직을 창설하였다.

그 전도자들은 국교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또 다른 경로로 진리가 전파되었다. 어떤 성직자들은 도덕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자기들의 교구에서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다. 그 결과 형식주의로 마비되었던 교회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웨슬리의 시대에는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가르치는 교리들이 서로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었으며 또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화이트필드와 웨슬리 형제도 견해 차이로 한때 서로 분리될 위험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운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곧 화해하였다. 오류와 불법이 도처에 가득하고, 죄인들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죽음을 모면한 웨슬리

하나님의 종들은 험한 길을 걸었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방해하고, 많은 성직자가 적의를 나타냈고, 교회들은 순결한 믿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 버렸다. 성직자들이 강단 위에서 그들을 비난하고 공격함으로 암흑과 불법이 성행하였다. 여러 번 웨슬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기적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격노한 폭도의 무리가 그를 습격하여 피할 길이 없는 듯이 보였을 때 사람의 모양을 한 천사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그러자 폭도들은 물러났고 그리스도의 종은 그 위험한 장소에서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폭도들에게서 구원받은 사건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이 나의 옷을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은 나를 세게 붙들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나의 호주머니 덮개를 꽉 붙잡았는데 그 부분만 뜯겨졌다. 다른 쪽 호주머니에는 은행 수표가 들어 있었는데 주머니 덮개의 절반만 찢어졌다. 또한 바로 내 뒤에 서 있던 건장한 사람이 큰 참나무 몽둥이로 나를 여러 차례 내려쳤는데 그가 만일 그것으로 내 뒤통수를 때렸다면 나는 고꾸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때릴 때마다 그 몽둥이는 빗나갔다. 나는 몽둥이가 빗나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메서디스트 교인들은 격분한 불신자들로부터 조롱과 박해를 받고 때로는 폭행을 당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메서디스트들의 집을 파괴하고 약탈하기 위해 언제 어디로 모이라는 광고가 공공연하게 나붙기도 하였다. 죄인들을 멸망의 길에서 성결의 길로 돌아서게 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불신자들은 이처럼 철저하게 박해하였다.

웨슬리 시대 직전에 영국에 나타난 영적 쇠퇴는 상당 부분 율법무용론 교리가 빚어낸 결과였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을 폐지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났고, “선을 행할 책임”에서도 해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들이 율법에 순종하라고 권면하는 것 자체가 무익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과 미덕을 실천하게 되고 이와 반대로 영원한 멸망이 예정된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능력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 한 번 선택받은 자들은 은혜를 받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은총을 박탈당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선택받은 자들이 범하는 악행은 진정한 범죄가 아니므로 죄를 고백하거나 회개함으로 죄를 버릴 필요가 없다.”는 매우 두려운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크게 어긴 가장 비열한 죄일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가 범한 것일 때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들은 하나님이 불쾌히 여기시는 일이나 율법이 금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 괴상한 교리는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도덕의 표준이 사회의 현실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후세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 모든 사상은 사탄의 정신에서 온 것인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율법의 정당성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죄 없는 하늘 거민들을 대상으로 이미 오래전에 착수한 사업이었다.

하나님의 선고로 사람의 품성이 고정된다는 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웨슬리는 율법무용론으로 이끌어 가는 이 교리를 단호히 반대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딛 2:11; 딤전 2:3~6).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이 값없이 주어졌다. “참빛” 곧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요 1:9)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생명의 선물을 스스로 거부한 까닭이다.

율법과 복음의 조화

“복음을 전하면 율법의 모든 목적을 다 이루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나 여전히 지옥의 언저리에서 잠자고 있는 자들을 일깨우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율법의 역할이다. 건강한 자 혹은 스스로 건강한 줄로 여기는 자를 위해 의사를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이 병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수고에 대해 그들은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교만하고 죄를 통회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한편 주님처럼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업을 충실히 감당하였으므로 영광스러운 결과를 보게 되었다. 80세가 되었을 무렵 반세기 이상의 봉사의 생애를 통하여 그는 50만 명 이상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그의 봉사를 통하여 타락과 멸망의 구덩이에서 고상하고 순결한 생애로 들어간 무리와 그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더욱 깊고 풍부한 체험을 얻은 사람들의 수는 구속받은 가족이 하나님의 나라에 모일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생애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교훈을 준다. 그가 보여 준 그리스도와 같은 종의 신앙과 겸손, 불굴의 열성, 극기, 헌신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각 시대의 대쟁투 엘렌 G. 화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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