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장 위협당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개신교회의 호감을 받고 있다. 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와 중요한 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과 개신교회가 조금만 양보하면 가톨릭교회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견해가 세력을 얻고 있다. 일찍이 개신교도들은 매우 고귀한 값을 치르고 얻은 양심의 자유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교황권을 거부하도록 가르쳤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불충성하는 일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겼는가?
교황권 옹호자들은 가톨릭교회가 그동안 오해를 받아 왔으며 무지와 암흑의 세기 동안에 지배권을 장악했던 그때 모습으로 오늘날의 교회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교회의 잔인성을 당시의 미개한 풍습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변명한다.
그 거만한 세력이 주장해 온 교황무오설을 잊었단 말인가?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는 결코 오류가 없었고 성경 말씀에 따라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가톨릭교회는 교황무오설을 결코 취소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세속적 정부들에 의한 제재가 사라지고 교회가 이전의 권세를 회복하면 그의 박해와 잔인성이 신속히 부활할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도 참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교회의 많은 사람이 받은 빛을 따라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만적이고 무의미한 신앙 교육을 받아 온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신다. 그분은 그들을 두르고 있는 짙은 암흑을 꿰뚫을 수 있는 빛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서게 될 것이다.
오늘날도 가톨릭교회의 제도는 과거처럼 그리스도의 복음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회복하고 박해를 부활시켜서 개신교회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없애 버리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 도처에서 그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그 교회의 수가 증가되고 있는 것을 보라. 개신교인들이 많이 공부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대학들과 신학교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보라. 영국에서의 의식주의(儀式主義)의 성장과 가톨릭교회로의 빈번한 귀화 현상들을 보라.
타협과 양보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를 후원하고 있다. 그들은 가톨릭교인들도 놀랄 만큼 타협과 양보에 나서고 있다.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진상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는 가장 위험한 원수인 가톨릭교회의 진격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
비록 가톨릭교회가 기만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지만 그것은 결코 조잡하거나 엉성하지 않다. 그들의 예배 의식은 매우 인상적이다. 화려한 장식과 엄숙한 의식은 사람들의 감각을 매혹하고 이성과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킨다. 웅장한 교회당, 당당한 행렬, 황금빛 제단, 보석으로 장식한 신상들, 뛰어난 그림들, 정교한 조각품들은 사람들의 미적 감각에 호소한다. 음악은 비할 데 없이 고상하다. 은은하면서도 풍부한 오르간 소리가 많은 사람의 음성과 섞여 웅장한 성전의 높은 천장과 둥근 기둥들이 서 있는 복도에 울려 퍼질 때 사람들은 경외감과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외형상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과 의식은 죄에 빠진 심령을 사로잡는다.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것으로 매력을 호소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에서 비치는 빛은 그 자체가 너무도 순결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 참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외적인 장식을 할 필요가 없다.
사탄은 종종 사람들의 고상한 예술 감각과 우아하고 세련된 취미를 이용하여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잊어버리게 하고 오직 현세만을 위해 살도록 한다.
가톨릭교회 예배의 화려한 모습과 의식에는 매혹적이며 황홀케 하는 일종의 힘이 있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기만당하여 가톨릭교회를 하늘 가는 문으로 쳐다보게 된다. 오직 진리의 기초 위에 굳게 서서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만이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들은 경건의 능력은 없고 그 모양만을 지닌 종교를 선호한다.
교회가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가톨릭교인들에게 마음대로 죄를 범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또한 고해성사는 범죄를 허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타락한 인간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고백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본성을 타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함으로 품성의 표준은 낮아지고 왜곡된다. 그는 하나님을 타락한 인간과 같은 분으로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제가 하나님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일 즉 고해성사는 이 세상을 더럽히는 많은 죄악을 흘려보내는 보이지 않는 샘의 근원이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마음을 펴놓는 것보다 자기와 동일한 인간에게 고백하는 일이 더 좋게 여겨진다. 고행이 죄를 버리는 것보다 인간의 본성에 더욱 잘 맞는 듯 보인다. 초라한 옷을 입고 육체를 괴롭게 하는 것이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보다 더 쉽다.
뚜렷한 유사점
가톨릭교회와 그리스도 초림 당시의 유대교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을 어기면서도 외형적으로는 그 조항들을 엄격하게 지켰다. 그리고 부당한 요구들을 첨가함으로 율법 준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존중한다고 공언했던 것처럼 가톨릭교회는 십자가를 높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십자가를 교회와 제단과 의복에 붙인다. 어디서나 십자가의 휘장은 존경과 높임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은 무의미한 전통들과 거짓 해석과 엄격한 규칙들의 무더기 아래 묻혀 버린다. 교회의 많은 지도자가 사치와 쾌락을 즐기는 반면 양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름으로 진노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지낸다.
사탄은 하나님의 품성과 죄의 본질 그리고 대쟁투의 성패가 달린 중대한 문제들을 잘못 나타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의 궤변은 하나님의 율법을 약화시키고 사람들로 죄를 범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그릇된 관념을 갖게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그분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킴으로 사탄은 이교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그리하여 여러 형태의 우상 숭배 아래 무섭고도 잔인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연합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혼합하여 이교들처럼 하나님의 품성을 잘못 나타내는 한편 잔인한 일을 자행했다. 고문 기구들을 사용하여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죽지 않을 만큼의 혹독한 고문 방법을 연구하였다. 많은 경우 고통당하는 자들은 죽음을 즐거운 해방으로 여기고 환영하였다.
로마 교회는 그 신봉자들에게도 채찍질과 금식과 그 외에 육체적 고통을 주는 온갖 징계를 가하였다. 참회자들은 삶을 복되고 즐겁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것들을 모두 끊어 버리도록 가르침 받았다. 동료 인간들에 대한 동정심을 갖는 것을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억누르기 위한 헛된 노력에 그들의 생애를 낭비한 수많은 희생자가 교회의 묘지에 묻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적합한 자가 되기 위하여 수도원에 은둔해야 한다는 모본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랑과 동정심을 억제해야 한다고 결코 가르치지 않으셨다.
암흑시대에 만들어진 교리들
교황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품성을 우리 구주의 품성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하늘의 왕으로 존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감옥과 고문대에 보낸 일이 있었는가? 그분께서 당신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가?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 흉악한 과거의 기록을 변명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상을 대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과거 로마 교회의 원칙들이 오늘날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암흑시대에 고안된 교리들이 지금도 여전히 실천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개신교도들이 존경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교 개혁 당시 세상을 지배한 이들로서 그 당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쳐 투쟁한 그 동일한 교회이다.
교황권은 마지막 시대에 배도하는 일이 있으리라고 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조직이다(살후 2:3~4). 그들은 여러 가지로 탈바꿈하였고 그 아래 변함없이 뱀의 독을 감추고 있다. 성도들의 피로 점철된 천여 년의 기록을 가진 이 세력이 어찌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일부로 인정될 수 있겠는가?
개신교 측에서의 변화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전과 달리 개신교회와 별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 개신교 국가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개신교회가 종교 개혁 시대 이후 크게 타락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가톨릭교회와 매우 비슷해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자 노력해 온 개신교회는 악을 선으로 믿게 되었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써 그들은 마침내 선을 악으로 믿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제 로마 교회를 무자비하게 비판한 것을 사과하고 자신들이 완고했던 점에 대해 용서를 빌고 있다. 사람들은 중세의 지적, 도덕적 흑암 때문에 로마 교회의 교리와 미신과 압박이 조장되었으며 현대의 발달된 지성과 종교 문제에 대한 자유 사상의 발전으로 인해 다시는 편협과 압제가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받은 빛이 클수록 그 빛을 왜곡하고 거절하는 자들의 흑암도 더 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적 어둠이 심했던 시대에 로마 교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지식의 빛이 밝은 시대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공에 유리하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과거에는 그들의 발 앞에 펼쳐져 있는 그물을 보지 못한 많은 사람이 거기에 걸려들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올무를 분별하지 못하고 마치 맹인이 된 것처럼 그리로 걸어 들어간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이론을 더욱 높일 때 총명은 무지보다 더욱 큰 해가 된다. 암흑시대에 지식을 통제함으로써 로마 교회가 발전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거짓 과학 역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적인 것임이 입증될 것이다.
일요일 준수
일요일 준수는 로마 교회가 만든 관습이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것이 교회의 권위의 표라고 주장한다. 가톨릭교회의 정신 곧 세상의 관습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높이는 정신이 개신교회에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이것은 교황권이 일요일을 존중한 바로 그 일을 하도록 이끌고 있다.
왕의 칙령과 총회와 세속 권력의 지지를 받은 교회의 의식들로 인해 이교의 축제일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존경받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요일 준수를 강요하는 최초의 법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제정되었다(서기 321년). 이것은 이교도의 법령이었으나 황제가 형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시행되었다.
군주들의 인정을 받고자 했던 콘스탄티누스의 가까운 친구인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할 성경의 증거를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유세비우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허위임을 시인하고 그날을 변경한 장본인들이 자신들임을 고백하였다. 그는 “안식일에 해야 할 일체의 의무를 우리는 주의 날로 옮겼다.”라고 하였다.
교황권이 확립되고 일요일 준수도 계속되었다. 얼마 동안 사람들은 제칠일을 여전히 안식일로 지켰다. 그러나 계속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 후 교황은 교구의 담임 신부들에게 일요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로 인해 큰 재난이 초래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경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의회의 결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자 교회는 세상의 집권자들에게 사람들을 위협하더라도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법령을 제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로마에서 개최된 종교 회의는 이전에 결정된 모든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그 결의는 종교적 법률이 되었고 나라의 집권자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일요일 준수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난처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태양의 날을 숭배하기 위하여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한 분명한 성경의 말씀을 무시할 권리가 지도자들에게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성경에 없는 증거를 보충하기 위해 교회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12세기 말에 한 열렬한 일요일 옹호자가 영국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충성된 진리의 증인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활동의 결실이 없었으므로 그는 잠시 그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하나님이 직접 주셨다고 하는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일요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명령과 이에 순종하지 않는 자를 위협하는 무서운 협박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귀중한 문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예루살렘의 골고다에 있는 성 시므온의 제단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로마 교황청이 그 출처였다. 각 시대를 통하여 많은 부정 수단과 위조 문서들이 교황권에 의해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돼 왔다(부록 참조).
일요일 신성설을 확립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에 한 종교 회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칠일이 하나님이 성별하신 날이며 유대인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지킨 날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안식일을 주의 날로 변경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함부로 변경한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엄한 형벌
로마 교회가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현저한 실례가 있으니 이는 왈덴스인들에게 가한 장기간에 걸친 잔인한 박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 중에는 안식일 준수자들이 있었다. 에티오피아와 아비시니아 교회들의 역사는 특별히 중요하다. 암흑시대의 어둠 속에서 중앙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띄지 않고 세상에서 숨겨졌다. 그들은 여러 세기 동안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로마 교회가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아비시니아 황제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승인하라는 요구에 굴복하게 되었다. 엄한 형벌 아래 안식일 준수를 금지하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그러나 교황권의 압제가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아비시니아 사람들은 그 멍에를 벗어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무서운 투쟁을 치르고 로마 교도들을 그들의 영토 밖으로 추방한 그들은 마침내 옛 신앙을 회복하였다.
아프리카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제칠일을 지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관습에 따라 일요일에도 노동을 하지 않았다. 로마 교회가 최상권을 잡게 되자 그 교회는 자신이 정한 날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안식일을 짓밟았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교회들은 거의 일천 년 동안 숨어 지내며 이 배교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 교회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자 그들은 참안식일을 버리고 거짓 안식일을 높이도록 강요당했다. 그러다 마침내 독립을 회복한 그들은 즉시 넷째 계명 안식일을 준수하였다(부록 34 참조).
이와 같은 기록들을 통해 참안식일과 그 옹호자들에 대한 로마 교회의 적의가 어떤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일요일을 높이기 위해 연합하게 될 때 이런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새끼 양같이 두 뿔 가진 짐승
요한계시록 13장의 예언은 새끼 양같이 두 뿔 가진 짐승으로 묘사된 세력이 “땅과 땅에 사는 자들”로 하여금 표범과 비슷한 짐승으로 표상된 교황권을 경배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두 뿔 가진 짐승은 또한 “땅에 사는 자들을…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게 할 것이며 더욱이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계 13:12~16) 할 것이라고 말한다.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는 짐승으로 표상된 세력은 미합중국이다. 이 예언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의 최상권을 인정하는 표라고 주장하는 일요일 준수를 미국이 강요하게 될 때 성취될 것이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계 13:3)게 되리라고 성경은 말한다. 죽게 되었던 상처는 1798년의 교황권의 몰락을 가리킨다. 바울은 “불법한 자”(살후 2:8)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속이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계 13:8)할 것이다. 신대륙과 구대륙 양쪽에서 일요일 제도의 존중을 통하여 교황권이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의 예언 연구자들은 요한계시록 13장의 기별을 세상에 전파하였다. 오늘날 진행되는 여러 사건을 통해 그 예언이 신속히 성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신교 지도자들 역시 일요일 준수에 관한 신성한 권위를 똑같이 주장하지만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대한 아무런 성경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인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다는 주장이 반복될 것인데 이미 그 일이 추진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매우 교묘하다. 그 교회는 개신교회가 거짓 안식일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또한 자신들이 과거에 사용했던 바로 그 방법으로 일요일을 강요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로마 교회가 이 사업에 있어서 개신교회의 도움을 얼마나 쉽게 얻게 될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청의 지배 아래 하나의 거대한 조직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각 나라에 있는 수많은 교인으로 하여금 교황에게 충성하도록 하고 있다. 그들이 국가에 충성을 맹세할지라도 그 바탕에는 교회에 대한 충성과 순종이 포석되어 있다.
로마 교회가 국가 정책에 개입하고자 은밀하게 꾸준한 노력을 해 온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일단 발판을 얻게 되면 국가 지도자들과 국민을 파멸시키더라도 자기의 목적을 관철시키고야 말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개신교도들은 일요일 준수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의 도움을 받고자 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열중하는 동안 로마 교회는 세력을 다시 구축하고 잃어버린 최상권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을 성취하고 있다. 교회가 국가의 권력을 좌우할 수 있고 세속적 법률로 종교를 강요할 수 있는 원칙이 확립되면 즉 교회와 국가의 권세가 양심을 지배하게 되면 승리한 로마 교회를 보게 될 것이다.
개신교회는 로마 교회의 목적을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올무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 로마 교회는 조용히 세력을 키우고 있다. 그들의 교리는 입법 기관과 교회들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때가 되면 그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힘을 축적하고 있다. 이 교회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유리한 입장에 서는 것이며, 이 일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난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