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제 6 장 두 영웅의 죽음

9세기 초에 이미 보헤미아 사람들은 자국어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국어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7세는 보헤미아인들을 노예로 삼으려고 하였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공중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교서를 내렸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당신께 경배하기를 기뻐하신다.”라고 교황은 선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길을 마련하셨다. 박해로 쫓겨난 많은 왈덴스인과 알비젠스인들이 보헤미아로 피난하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열심히 활동하였으며 그들을 통하여 참된 신앙이 보존되었다.

얀 후스(John Huss)가 태어나기 전 보헤미아에는 이미 교회의 부패를 규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도승들은 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복음 전파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로마 교회의 예배에서 벗어나는 자는 화형에 처한다는 법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참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업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였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이제 평민 가운데서 한 사람이 일어날 것인데 그는 권세와 칼을 쥐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 예언의 응답으로 한 사람이 준비되고 있었다. 로마 교회에 대항하는 그의 증언은 모든 나라를 일깨우게 될 것이었다.

후스는 비천한 계급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의 경건한 어머니는 교육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러한 유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힘썼다. 후스는 처음에 지방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얼마 후에 구호 장학금을 받아 프라하 대학교로 가게 되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후스는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온유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로마 교회를 열렬히 신봉하는 사람이었으며 교회가 약속하는 영적 축복을 매우 갈망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신부의 직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신속히 승진하여 왕실에 소속되어 일하였다. 그는 또한 대학 교수가 되고 이후에 그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구호 장학금을 받던 비천한 학생이 나라의 자랑이 되었고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나중에 후스와 친구가 된 제롬(히에로니무스, Hieronymus)이 영국에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지고 와서 그에게 주었다. 위클리프의 교훈을 받아 회심하게 된 영국 왕후는 본래 보헤미아의 공주였다. 그녀의 감화를 통해 보헤미아에 개혁자의 저술이 널리 유포되었다. 후스는 그러한 저술들을 흥미 있게 읽었으며 위클리프가 주장하는 개혁 사업에 호의를 갖게 되었다. 비록 후스 자신은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는 점점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후스에게 감명을 준 두 그림

이 무렵에 학식 있는 두 사람이 영국에서 진리의 빛을 받고 프라하에 와서 그 빛을 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교황의 최상권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으므로 즉시 당국으로부터 발언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고안하였다. 그들은 본래 설교자인 동시에 화가였으므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렸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광경이었다. 그분께서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셨다(마 21:5). 제자들은 여행으로 더러워진 헌 옷을 입고 맨발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다른 한 장은 교황의 행렬을 그린 것인데 교황은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삼층 관을 쓰고 아름답게 장식한 말을 탔으며, 나팔수들이 앞서 행진하고, 뒤에는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눈부신 행렬이 따라가고 있었다.

군중이 몰려와서 그 두 장의 그림을 주목하여 보았다. 그림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프라하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두 사람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얼마 후 그곳을 떠나갔다. 그 그림은 후스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과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그는 성경과 위클리프의 저서를 더욱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비록 그가 아직 위클리프가 주장한 개혁을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그는 교황권의 참모습을 알게 되었고 교황권의 교만과 야심과 부패를 규탄하게 되었다.

파문 선고를 받은 프라하

진리의 빛은 보헤미아에서 독일로 전파되었다. 왜냐하면 프라하 대학의 소동으로 수백 명의 독일 학생이 고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많은 학생이 후스에게서 처음으로 성경을 배웠는데 그들은 돌아가서 각자 자기 나라의 많은 곳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프라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후스는 곧 교황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에 응하는 것은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헤미아의 왕과 왕후와 귀족과 대학과 정부의 고관들은 연합하여 후스를 프라하에 머물게 하고, 대리자를 로마에 파견하여 대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교황에게 호소하였다. 교황은 그 요구를 수락하는 대신 후스에게 심문 선고를 내리고 프라하시를 파문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다.

이와 같은 선고는 큰 경악을 자아냈다. 당시 사람들은 교황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심판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대리자로 믿고 있었다. 교황이 파문 선고를 철회하기 전까지는 죽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믿고 있었다. 모든 종교 행사는 중지되었다. 교회들은 문을 닫았고, 결혼식은 교회당의 뜰에서 거행되었으며, 죽은 자는 장례식 없이 개천이나 들판에 매장되었다.

프라하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후스를 비난하고 그를 로마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후스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도 그는 활동을 그치지 않고 각처로 다니며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얼마 후에 프라하의 소동이 진정되자 후스는 그곳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하였다. 그의 원수들은 강력했지만 왕후와 많은 귀족이 그의 친구가 되었고 수많은 대중이 그를 지지하였다.

지금까지 후스는 단독으로 일해 왔으나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제롬이 개혁 사업에 동참하였다. 그 후 두 사람은 함께 지내게 되었으며 죽음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대중의 인기를 끄는 재간을 가진 제롬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고 언변과 학식이 뛰어났다. 그러나 인격은 후스가 한층 탁월하였다. 그의 냉정한 판단력은 제롬의 충동적인 정신을 제어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제롬은 후스의 장점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의 권면을 잘 받아들였다. 그들의 연합된 활동으로 개혁 사업은 신속하게 확장되어 갔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큰 빛을 주셨으므로 그들은 로마 교회의 여러 가지 오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 전해야 할 모든 빛을 다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로마 교회의 어둠에서 나오도록 인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한 단계씩 인도하셨다. 정오의 햇빛같이 눈부시게 밝은 빛이 암흑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주어졌다면 그들은 빛을 등지고 돌아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감당할 만큼만 조금씩 빛을 드러내셨다. 시대가 흐르면서 충성된 일꾼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사람들을 차츰차츰 깊은 개혁의 길로 인도하였다.

교회 내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세 명의 교황이 제각기 최상권을 장악하고자 다투고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에는 범죄와 다툼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피차 저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력에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각각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를 모집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으며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교회의 은사, 지위, 축복 등이 돈으로 매매되었다(부록 참조).

후스는 소위 종교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가증한 행위를 담대하게 비난하였다. 백성도 로마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비참하게 만드는 자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다시 프라하에는 유혈의 참극이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옛날에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왕상 18:17)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도시는 두 번째로 파문 선고를 받았고, 후스는 시골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제 그는 진리의 증인으로 그의 생명을 바치기 전에 더욱 넓은 무대에서 그리스도교 나라들을 향한 증인이 되어야 하였다.

콘스탄스(독일 남부)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시기스문트(Sigismund) 황제의 희망에 따라 세 경쟁자 중 하나인 요한 23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교황 요한은 인격적인 면이나 그가 펼치는 정책에 있어서 당시 교인들에게뿐 아니라 타락한 주교들로부터도 힐책과 비난을 받을 정도였기 때문에 회의를 개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감히 시기스문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부록 참조).

총회의 목적은 두 가지였는데 곧 교회 내의 갈등을 완화하고 이단의 뿌리를 뽑는 것이었다. 경쟁 관계의 두 교황과 후스도 그 회의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교황의 경쟁자인 두 교황은 자신들의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직접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그들의 대표자를 참석시켰다. 교황 요한은 교황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자행한 범죄와 그 면류관을 욕되게 한 행위에 대하여 문책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회의에 임하였다. 그는 교회의 높은 직분을 가진 사람들과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의기양양하게 콘스탄스성으로 들어갔다. 그의 머리에는 황금색 천이 덮였고 그것을 지방 장관 네 사람이 붙들고 있었다. 미사를 위한 거룩한 물이 그 앞에서 운반되어 갔으며 추기경들의 화려한 복장은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그때에 또 다른 여행자가 콘스탄스성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스는 친구들과 작별하며 그것이 그들과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느꼈다. 화형주가 차츰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예감하였다. 그는 보헤미아 왕으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통행권을 받았고 또한 시기스문트 황제로부터도 여행의 안전을 위한 통행권을 받았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며 주변 일들을 정리하였다.

왕으로부터 받은 통행권

후스는 프라하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들이여…나는 왕의 통행권을 가지고 많은 대적을 만나러 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구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또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즉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만일 나의 죽음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된다면 그날이 하루속히 이르도록 그리고 내가 당하게 될 모든 고난에 그분께서 항상 나를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형제들에게 훌륭한 본을 남길 수 있도록 복음의 일점일획이라도 숨기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 주십시오.”16

그는 복음의 사도가 된 신부에게 보내는 또 다른 편지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기를 좋아하고 천박한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그 신부를 비난했던 과거 자기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감동적인 권고를 덧붙였다. “부와 재산에 마음을 팔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것과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대의 마음을 채우십시오. 그대의 집을 꾸미는 것보다 마음을 단장하는 일을 더 중히 여기며 무엇보다 영적인 일에 관심을 쏟으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며, 그대의 물질을 쾌락을 즐기는 일에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콘스탄스성에 도착한 후스에게 처음에는 자유가 허락되었다. 황제의 통행권과 함께 교황의 개인적인 보증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된 보증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는 교황과 추기경들의 명령으로 곧 체포되어 음침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후에 그는 라인강 건너편에 있는 견고한 성안으로 이송되어 죄수로 수감되었다. 교황도 얼마 후에 그 동일한 장소에 갇히게 되었다. 교황은 살인, 성직 매매, 간음 외에도 말할 수 없이 추악한 죄악을 범한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그는 삼층 면류관을 박탈당하였고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다.

후스가 비난한 신부들의 죄보다 교황의 죄가 훨씬 더 엄중했지만 교황을 파면시킨 바로 그 동일한 의회가 이제 이 개혁자를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후스의 투옥은 보헤미아 사람들의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자기가 발행한 통행권이 침해당한 것을 불쾌히 여긴 보헤미아의 왕은 후스에 대한 조치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개혁자의 원수들은 악독하고 완고하였다. 그들은 “비록 황제나 국왕으로부터 통행권을 받은 자라도 그가 이단이나 이단 혐의를 받은 자일 경우에는 그 약속이 이행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감방의 습기와 불결한 공기 때문에 열병에 걸려 거의 죽음 직전에 놓인 후스가 마침내 의회에 끌려 나왔다. 그는 무거운 쇠사슬에 매인 채로 황제 앞에 섰다. 황제는 일찍이 후스를 보호해 주기로 서약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후스는 확고부동하게 진리를 주장하였으며 거리낌 없이 교회의 부패를 규탄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리를 취소하든지 죽음을 택하든지 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기꺼이 순교자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지켜 주었다. 최후의 선고를 받기 전 고난의 몇 주일 동안 하늘의 평화가 그의 심령을 가득 채웠다. 그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사형 선고를 기다리면서 쇠사슬에 매인 손으로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지극히 평화로운 내세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자비를 베푸셨는지, 시험과 시련을 당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셨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미리 본 승리

음산한 감옥에서 그는 참된 신앙의 승리를 미리 보았다. 꿈속에서 그는 자기가 프라하의 교회당 벽에 그려 놓은 그리스도의 그림들을 교황과 주교들이 지워 버리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은 그를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많은 화가가 더욱 찬란한 색채로 더 많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화가들은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자 이제는 교황이든 감독이든 와 보라. 그들도 더 이상 이 그림들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개혁자는 그가 꾼 꿈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소멸해 버리고자 했지만 그것은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설교자들을 통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롭게 그려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후스는 다시 의회에 소환되었다. 그것은 실로 규모가 크고 엄숙한 집회였다. 황제와 왕자들, 사신과 추기경들과 감독과 신부들이 참석하였고 밖에는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최후의 결심을 표명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후스는 자신의 견해를 결코 철회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는 약속을 깨뜨린 황제를 응시하며 말하였다. “저는 여기 계시는 황제께서 저를 보호해 주실 거라는 약속을 믿고 저의 자유 의지로 이곳에 참석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에게 집중되었으며 시기스문트 황제는 얼굴을 붉혔다.

선고가 내려지고 지위를 박탈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후스는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다시 받게 되자 군중을 향해 돌아서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게 한다면 제가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순전한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을 어떻게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저 사람들의 구원은 죽음을 앞둔 나의 보잘것없는 몸뚱이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의 사제복은 하나씩 벗겨졌고, 주교들은 각자가 맡은 의식을 행하며 후스에게 저주를 선언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그의 머리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만든 종이 고깔을 씌웠는데 거기에는 악마의 무서운 형상이 그려져 있었고 앞면에는 ‘대이단자’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 후스는 부르짖었다. ‘오 예수님, 주께서는 저를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니 저는 벅찬 기쁨으로 주님을 위하여 이 치욕의 관을 씁니다.’ 의식을 행한 후에 주교는 ‘네 영혼을 마귀에게 주노라.’라고 하였다. 그때 후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오, 주 예수여! 당신이 저를 구원하셨으니 제 영혼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라고 말하였다.”

화형주에 달린 후스

후스는 이제 처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많은 군중, 몇 백의 무장한 사람들, 아름다운 의복을 입은 신부와 주교들, 콘스탄스성의 주민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화형주에 결박되고 불을 붙일 준비가 마쳐지자 순교자에게 그의 오류를 취소함으로 자신을 구원하라는 권고가 다시 한번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 내가 저술한 것과 설교한 모든 것은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동안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기쁘게 확증하노라.”

불꽃이 주위에서 타오르자 후스는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찬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찬송은 그의 음성이 그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열성적인 한 가톨릭 신자는 후스와 그 후에 진행된 제롬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두 사람은 최후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확고부동하였다. 그들은 화형을 받기 위하여 나아가기를 마치 혼인 잔치에 나아가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들은 고통으로 소리 지르지 않았다. 불길이 타오를 때 그들은 찬미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거센 불길도 그들의 노래를 그치게 할 수 없었다.”

후스의 몸이 다 타 버리자 그들은 재와 흙을 모아 라인강에 뿌렸다. 그의 핍박자들은 이제 그가 전한 진리를 소멸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다로 흘러 들어간 그 재는 씨앗이 되어 지상의 모든 나라로 흩어질 것이었다. 훗날 그 씨는 당시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에서 진리를 증거 하는 일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었다. 콘스탄스 의회에서 외친 그의 음성은 그 후 각 시대를 통하여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의 신앙과 충성의 모본으로 인해 후세의 많은 사람이 고문과 죽임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서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또한 후스의 처형을 통해 로마 교회의 잔인성이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진리의 원수들은 자기들이 없애 버리려고 한 그 사업이 오히려 발전하도록 돕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또 한 사람의 증인의 피가 진리를 증거 하여야 할 것이었다. 제롬은 후스가 의회에 나갈 때 용기와 확고한 태도를 가지도록 격려하였고 만일 그에게 위험이 닥치면 즉시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개혁자의 투옥 소식을 듣자 그 충실한 제자는 그의 약속을 지킬 준비를 하였다. 그는 통행권도 없이 콘스탄스성을 향해 떠났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후스를 구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도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성에서 피하였으나 돌아가는 길에 붙잡혔고 쇠사슬에 매여 호송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의회에 나타나 그에 대한 소송에 답변하고자 했을 때 그는 “화형에 처하라. 화형에 처하라.”는 부르짖음을 듣게 되었다. 그는 쇠사슬에 결박된 채 투옥되었으며 약간의 빵과 물만 제공받았다. 옥중에서 너무나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므로 제롬은 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의 원수들은 그가 그대로 죽을 것을 염려하여 다소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그는 1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제롬이 굴복함

주교 회의에서는 제롬을 화형시키는 대신 그를 설득하여 그의 주장을 철회토록 하기로 결정하였다. 제롬은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든지 화형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옥중에서 당한 고통과 질병 때문에 기력이 쇠하여졌고, 근심과 불안에서 오는 괴로움, 친구들과의 이별, 후스의 죽음으로 인한 낙심 등의 일로 제롬은 용기를 잃고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고, 위클리프와 후스가 가르친 교리 중 소위 “신성한 진리” 이외의 것을 정죄한 주교 회의의 결정을 수락하였다.

제롬은 양심의 소리에 침묵하고 다가올 죽음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감방의 적막 속에서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후스의 충성과 용기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것과 비교해서 진리를 거부한 자신의 가련한 행동을 반성하였다. 또한 그는 자기가 섬기기로 서약한 거룩하신 주님,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였다. 신앙을 철회하기 전에는 온갖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으로 위로를 받았으나 이제는 후회와 자책으로 몹시 괴로웠다. 그는 로마 교회와 화해하려면 아직도 여러 번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들어선 길은 결국 완전한 배도로 끝나고 말 것이었다.

제롬이 회개하고 새로운 용기를 얻음

얼마 후에 그는 다시 의회에 끌려 나왔다. 그의 재판관들은 그의 굴복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제롬이 진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는 한 그는 생명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때 그는 믿음을 고백하고 후스의 뒤를 따라 화형을 당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이전의 말을 취소하였으며, 죽음을 각오하고 변명할 기회를 달라고 엄숙히 요구하였다. 그의 말이 끼치게 될 영향을 두려워한 주교들은 그에 대한 고소에 대해서만 답변하라고 주장했다. 제롬은 그 잔인한 불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너희는 나를 불결하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곳에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은 채 340일을 구금하였다. 이제 나를 너희 앞에 끌어내어 나를 죽이려는 원수들의 말은 들어 주면서 나의 증언은 듣기를 거부하고 있다. …공의를 거스려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나는 단지 연약한 인간일 뿐이며 나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다. 불의한 선고를 내리지 않도록 너희에게 권고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이다.”

그의 요구는 마침내 수락되었다. 제롬은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께서 자기의 생각과 말을 제어해 주셔서 주님을 욕되게 하거나 한마디라도 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날 그에게는 다음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8~20).

제롬은 1년 동안 감옥에 갇힌 채 책을 보거나 읽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마치 그가 그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분명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청중에게 불의한 재판관에게 정죄의 선고를 받았던 성도들을 일일이 열거하였다. 거의 모든 시대에 있어 그 시대의 백성을 계몽하려고 힘쓴 자들이 비난을 받고 배척을 당하였으나 후에는 영광을 받은 것과 그리스도도 불의한 법관에게 악인으로 정죄를 받으신 사실을 지적하였다.

제롬은 이제 자신의 회개를 선포하였고 순교자 후스의 무죄와 성결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는 그를 어릴 때부터 알았다. 그는 의롭고 거룩하며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죄도 없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나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나는 원수들과 거짓 증인들이 마련해 놓은 고통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장차 그들은 아무도 속일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기만적 행위들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한때 진리를 부인한 사실에 자책감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청년 시절 이후로 내가 범한 모든 죄 중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내가 이 흉악한 장소에서 범한 죄이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스승이요 친구인 거룩한 순교자 후스와 위클리프에 대하여 내린 사악한 선고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제 진심으로 그 일을 참회한다. 부끄럽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교리를 부인한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여러 가지 죄를 용서해 주시되 특히 가장 가증한 이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탄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는 재판관들을 가리키며 엄숙하게 말하였다. “너희는 위클리프와 후스에게 정죄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들이 교회의 올바른 교리를 공격한 것 때문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비행과 추문, 허식과 교만, 주교와 신부들의 온갖 죄악을 드러내고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위클리프와 후스처럼 나 역시 너희를 규탄하는 바이다.”

그의 말은 저지되었다. 주교들은 격분하여 몸을 떨면서 “더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한가? 우리는 가장 완고한 이단자를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라고 부르짖었다.

제롬은 그 소란 중에도 확고한 태도로 말하였다. “너희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줄로 생각하는가? 너희는 과거 1년 동안 죽음보다 더욱 참혹하고 무서운 감옥 속에 나를 가두었다. …나는 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처럼 심한 만행을 저지른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죽음이 결정됨

다시 소동이 일어났으므로 제롬은 급히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때 모였던 사람들 중에는 그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 이들도 있었다. 제롬을 방문한 교회의 권력자들은 대의회의 결정에 복종하라고 권고하였다. 로마 교회에 대한 반대를 취소한다면 그에게는 보상으로 세속적인 영화가 주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으로 나의 오류를 지적한다면 나는 그것을 기꺼이 버리겠다.” 그를 회유하던 한 사람이 소리쳤다. “성경이라고? 그렇다면 만사를 다 그것으로만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냐? 교회가 성경을 해석해 주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제롬은 “우리 구주의 복음보다 사람의 전통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항변했다.

“이단이로다.”라는 외침이 일어났다. “내가 지금까지 너를 위해 그처럼 오랫동안 탄원한 것을 후회한다. 네가 악마의 충동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롬은 후스가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장소로 끌려 나왔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나아갔으며 그의 얼굴은 평화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서 죽음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사형 집행자가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그의 뒤로 돌아가자 순교자는 “나의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내가 두려워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힘 있게 말했다.

화염이 그를 둘러싸자 그는 최후의 기도를 드렸다. “주여, 전능하신 아버지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내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내가 언제나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불길이 그치고 순교자의 재는 거두어져 후스의 재처럼 라인강에 뿌려졌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충성된 빛의 전달자는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파한 진리의 빛, 그들의 영웅적인 모본으로 남긴 광채는 소멸될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세상에 다가오고 있는 여명을 막으려는 것은 마치 사람이 태양을 그 돌고 있는 궤도에서 역전시키려는 것과 같이 무모한 일이었다.

후스의 처형은 보헤미아에 분노와 공포의 불을 지폈다. 온 국민이 그를 충성된 진리의 교사로 인정해 왔다. 그리하여 주교들의 의회는 살인죄를 범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교리는 어느 때보다 더욱 큰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개혁자들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황과 황제는 연합하여 이 운동을 진압하려 하였으며 시기스문트의 군대가 보헤미아에 투입되었다.

이때 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당시 가장 훌륭한 장군 중 한 사람인 지스카가 보헤미아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침공해 오는 강력한 군대와 맞서 싸웠다. 황제는 거듭 새로운 군대를 보내 보헤미아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를 당할 뿐이었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아무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었다. 개전 후 불과 수년 만에 용감한 지스카 장군이 죽었으나 그보다 더욱 뛰어난 장군인 프로코피우스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교황은 후스의 신봉자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파견할 것을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군대가 보헤미아에 투입되었으나 그들도 패배를 당할 뿐이었다. 또다시 십자군의 파견이 선포되었다. 교황을 지지하는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전쟁을 위해 사람과 자금과 군수품을 모았다. 수많은 사람이 교황의 깃발 아래 모였다.

많은 수의 군사가 보헤미아로 진군하였고 보헤미아의 백성도 그들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집결하였다. 두 군대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후스 신봉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아주 먼 곳으로부터 온 십자군은 월등하게 우세한 군대였으나 그들은 시내를 건너서 급히 돌진하거나 접전을 벌이는 대신 조용히 상대 전사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갑자기 그 대군은 이상한 공포감을 느꼈고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에 의해 쫓기듯이 공격을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도망하는 그들을 뒤쫓았고 막대한 전리품이 승리자들의 손에 들어왔다. 그 전쟁은 보헤미아 사람들을 곤궁에 빠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부요하게 해 주었다.

수년 후에 다른 교황이 십자군을 다시 일으켰다. 많은 군대가 보헤미아로 쳐들어왔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그 대군 앞에서 후퇴하며 침략자들을 국내로 깊숙이 유인하였고 그들이 승리한 줄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프로코피우스의 군대는 퇴각을 정지하고 원수들을 향해 돌아서서 그들과 싸움을 시작하였다. 십자군은 적군이 접근해 오는 소리를 듣자 후스파의 군대를 보기도 전에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왕족들과 장군들과 군사들은 그들의 무기를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하였다. 침략군은 완전히 패배하였고, 막대한 전리품이 다시 승리자의 손에 들어왔다.

이리하여 유럽의 가장 강력한 나라들로부터 파견된 용감하고 호전적이며 전쟁을 위하여 훈련된 두 번째 대군도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연약한 시민들로 구성된 소수의 방위군 앞에서 패주하였다. 침략군은 초자연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진멸시키고,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 앞에서 미디안의 군대를 도망하게 하며, 하룻밤 사이에 교만한 앗시리아 군대를 쳐부순 하나님께서 압제자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다시 한번 펼치셨던 것이다.

계략에 의하여 배반당함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일을 단념하고 다시 계략을 사용하였다. 겉으로는 보헤미아인들의 양심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공언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을 로마의 권력에 넘겨주는 타협책을 제시하였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로마와 화해하는 조건으로 다음의 네 가지 점을 분명히 했다. 첫째 성경을 강론하는 자유, 둘째 모든 교인이 성만찬 예식에 참석하여 떡과 포도즙을 나눌 수 있고 예배 시간에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셋째 성직자를 모든 세속적인 직위와 권력에서 배제시킴, 넷째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 법정의 사법권이 성직자나 일반인을 동일하게 취급해야 함이었다. 가톨릭교회 지도층은 후스 신봉자들이 제시한 네 가지 조건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 조항들의 명확한 의미를 결정하는 해석권은 종교 회의 즉 교황권과 황제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조약에 서명했고, 로마 교회는 물리적인 충돌로 얻지 못한 것을 기만과 사기로 얻어 냈다. 그들은 성경을 교회의 권위로 마음대로 해석한 것처럼 후스 신봉자들이 제시한 조건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독단적인 해석을 내림으로써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그 조항들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보헤미아인은 그 조약이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인식했고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분열과 분쟁이 발생했고 나중에는 투쟁과 유혈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 내란으로 인하여 프로코피우스 장군은 죽고 보헤미아인들의 자유는 사라졌다.

소란과 유혈 사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외국 군대가 다시 보헤미아에 침입하였고, 끝까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한 사람들은 피 흘리는 박해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확고부동한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깊은 산과 동굴 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여러 나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알프스 산중에 오래된 교회가 있으며 그들은 성경 말씀을 따라 살며 로마 교회의 우상 숭배와 부패에 저항하고 있”음을 각지에 알렸다. 그들은 큰 기쁨으로 왈덴스인들과도 교통하게 되었다.

보헤미아인들은 복음에 굳게 서서 박해의 어두운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에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시선을 멀리 지평선 너머로 향하였다.

각 시대의 대쟁투 엘렌 G. 화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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