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장 현대 신앙 부흥
하나님의 말씀이 충실히 전해진 곳은 어디에서나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하는 결과들이 뒤따랐다. 죄인들은 그들의 양심이 각성됨을 느꼈고 정신과 마음에 깊은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여호와의 의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라고 부르짖었다.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무한한 희생을 지불한 갈보리의 십자가가 분명히 제시되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그들의 죄를 속(贖)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롬 3:25)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 그들은 믿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애를 출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분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그들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고 전에 사랑하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게 되었다. 교만하고 자기주장만 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술주정뱅이가 술을 끊고 방탕하던 자가 순결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라는 권면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신앙 부흥은 죄인을 향한 엄숙한 호소로 이어졌다. 그 결과로 극기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난과 시련을 당하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에 나타난 변화를 보았다. 지역 사회는 그들의 감화로 유익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신 결과였다. 개혁이 따르지 않으면 참된 회개가 아니다. 서약한 것을 이행하고, 도둑질한 것을 돌려주고,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증거이다. 이전에 있었던 종교적 각성에 뒤따랐던 결과들은 이러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신앙 부흥은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회심을 고백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을 보증할 만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타오르는 불길은 오래지 않아 꺼져 버린다.
인기 있는 신앙 부흥은 흔히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며 새롭고 놀랄 만한 것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회개한 자들은 성경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지 않으며 선지자와 사도들의 증언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종교 집회에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특성이 없으면 그들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냉철한 이성에 호소하는 기별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영원한 사물에 대한 관심이 인생의 큰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기 있는 교회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정신이 있는가? 회심하였노라고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교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종교는 무신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의 놀림감이 되어 버렸다. 많은 교회에서 경건의 능력이 거의 떠나갔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
믿음과 경건의 보편적인 퇴보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세상에 내리기 전 주님의 백성 가운데는 사도 시대 이래로 목격하지 못한 근본적인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과 권능이 그분의 자녀들 위에 부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대신 이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올 것이다. 목사들과 신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주의 재림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키고자 이 시대에 전파되고 있는 큰 진리를 즐거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거짓 부흥 운동을 일으켜 이를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기만의 세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에는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내린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큰 신앙적 부흥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실상은 전혀 다른 영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신다고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탄은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자기의 세력을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확장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부흥에는 잘못된 곳으로 이끌기에 알맞은 참과 거짓을 혼합한 감정적인 자극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보면 그런 운동의 성격을 분별하기가 어렵지 않다. 성경의 증거를 무시하고, 자아를 부인하고 세속을 버리도록 요구하며 심령을 살피게 하는 분명한 진리에서 돌아서게 하는 그런 곳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는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라는 원칙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운동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사탄의 속임수를 막아 주는 방벽이 된다. 진리를 소홀히 함으로써 오늘날 종교계에 널리 퍼진 악이 들어오는 문이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의 속성과 중요성이 대부분 상실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릇된 개념은 회개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오류를 가져왔고 그 결과 교회 안에서 경건의 표준이 낮아졌다. 오늘날의 신앙 부흥 가운데 하나님의 영과 권능의 역사가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자유의 율법
많은 종교 지도자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으심으로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사람은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마치 무거운 멍에처럼 제시하면서 복음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율법의 속박과 대조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윗은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시 119:45)라고 말하였다. 사도 야고보는 십계명을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하였다(약 1:25). 또한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흠정역 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로 번역됨)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있었다면 사람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을 폐지하기는커녕 율법의 불변성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사 42:21 난외 주석) 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을…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분은 당신에 관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불변이며 그것은 율법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그분의 율법도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시 119:142, 172)니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선언한다.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의 표현이므로 그 창시자와 같이 영구적이다.
회개와 성화는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일치되게 해 주므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한다. 태초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과 본성에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의의 원칙이 그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죄가 창조주와 사람을 분리시켰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반대되게 되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이런 일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3:16, 3).
죄의 각성
하나님과 화목하는 첫 단계는 죄를 깨닫는 것이다.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죄인이 죄를 깨달으려면 먼저 자기의 품성을 하나님의 위대한 의의 표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의로운 품성의 완전함을 보여 주는 거울로써 죄인에게 그의 결함을 분별하게 해 준다.
율법은 사람에게 그의 죄를 드러내 주지만 죄를 치료하지는 못한다. 율법은 순종하는 자에게는 생명을 약속하지만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는 사망을 선고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죄의 선고와 더러움에서 사람을 해방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으므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그의 대속물로 믿어야 한다. 그리하면 그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롬 3:25)을 받고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해도 되는가?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라고 하였다. 거듭남을 통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며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위대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면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성결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된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던 옛 생애는 끝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믿음과 사랑의 생애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롬 8:4) 한다. 그때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라고 외치게 된다.
율법이 없으면 사람들은 죄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도, 생애의 개혁도 없이 구원의 소망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피상적인 회개가 보편화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경험이 없는 많은 사람이 교회로 들어오게 된다.
성화란 무엇인가?
성화에 대한 잘못된 이론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데서 생겨난다. 교리적으로 거짓될 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이와 같은 이론들이 일반적으로 환영받고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성화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 준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다. 바울은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롬 15:16)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요 16:13)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며 완전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나타내 주므로 그런 율법에 순종할 때 품성 또한 거룩해진다. 그리스도는 그런 품성의 완전한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요 15:10; 8:29)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율법의 원칙과 조화되는 품성을 계발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이다.
오직 믿음으로
이런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의 내재하는 능력으로 성취된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유혹을 받지만 그는 언제나 그것에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시킬 때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고전 15:57)라고 외치게 된다.
성화의 과업은 점진적이다.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때 그리스도인 생애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그는 “완전한 데 나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라고 말하였다.
성경상 성화를 체험한 사람들은 겸손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다. 그들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순결과 완전에 비추어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된다. 선지자 다니엘은 참된 성화의 모본이다. 그의 일생은 주님을 위하여 바친 고상한 봉사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하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단 10:11)이었다. 그러나 이 존경받는 선지자는 자신의 순결과 성결을 주장하는 대신 자신을 죄 많은 이스라엘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였다.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단 9:18).
갈보리 십자가의 그늘 밑을 걸어가는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스스로를 높이거나 자만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고뇌의 원인이 자기들의 죄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비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가까이 생애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악과 약점을 가장 분명히 깨닫게 되며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에 있음을 알게 된다.
오늘날의 종교계가 크게 주장하는 성화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것은 자아를 높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성화는 순간적인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 완전한 성결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믿기만 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들은 율법의 권위를 부인하면서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품성과 뜻을 나타내는 원칙과 일치되지 않으면서 성결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의 교리를 반대한다. 은혜를 받는 데 필요한 조건은 이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참람된 억측이다(약 2:14~24).
하나님의 요구 중 한 가지를 고의로 범하면서도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신조를 가지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고의로 범하는 죄는 죄를 깨우쳐 주는 성령의 음성을 침묵시키고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한다. 요한은 그의 편지들을 통해 사랑을 충분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면서도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참모습을 분명히 지적한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요일 2:4~5). 여기에 모든 사람의 신앙 고백을 검토할 수 있는 시금석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고 가볍게 여기는 자들,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범하고 또 그렇게 남을 가르치는 자들의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음을 알게 된다.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 자체가 성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순결과 성결에 대한 참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증하고 흉악한 죄의 성질을 올바로 깨닫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성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멀리하면 할수록 스스로 의롭게 보이게 된다.
성경적 성화
성화는 전인 곧 영과 혼과 몸을 다 포함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최선을 다해 양호한 상태로 유지하여야 한다. 마음과 몸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를 위한 봉사에 부적합하게 만든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는 삶을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정욕이나 식욕에 방종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제물을 약화시키거나 더럽게 해서는 안 된다.
죄악적인 욕망을 만족시킬 때마다 신체의 기능과 영적, 지적 감각이 마비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성령의 감화가 약화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이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유행을 따르는 데 몰두한 나머지 그들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가져오는 헌물로 채워야 할 교회 금고를 오히려 악으로 채우고자 한다. 만일 예수께서 오늘날의 교회에 오셔서 종교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고 있는 연회와 부정한 거래들을 보신다면 그분은 과거에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런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으시겠는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하나님의 성령의 전을 그 몸에 가진 사람은 해로운 습관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능력은 피로써 그를 사신 그리스도의 소유이다. 그의 소유물도 주님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자산을 어떻게 낭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막대한 돈을 쓸데없고 해로운 일에 낭비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와 헌금을 도둑질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거나 복음 사업을 지원하는 일에 쓰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자신을 파멸시키는 정욕의 제단에 바친다. 만일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성화되었다면 그들은 재물을 쓸데없고 해로운 방종에 낭비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창고에 바쳤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절제와 극기와 자아 희생의 모본을 보이며 세상의 빛이 되었을 것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 많은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더 고상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 받았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 6:17~18)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감
믿음과 순종의 매 발걸음은 세상의 빛 되신 그리스도와 더욱 밀접한 연결을 갖게 해 준다. 의의 태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밝은 빛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비칠 때 그들은 그분의 빛을 반사하게 된다. 별들은 그들을 빛나게 해 주는 큰 빛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품성에 있어서 찬양과 모본이 되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품성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는 무한한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하나님이 인정하고 축복하는 생애를 누리는 것이 모든 사람의 특권이다. 언제나 죄의식과 흑암 아래 지내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머리를 숙이고 자아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고 다니는 것은 참된 겸손의 증거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께 나아가 깨끗하게 되고 율법 앞에 부끄러움과 가책 없이 설 수 있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분은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히 2:11)하신다. 그리스도인 생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승리와 기쁨의 생애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와 같은 일이 성경의 회개와 성화의 열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나타난 의의 큰 원칙을 그리스도교가 소홀히 여겼으므로 이러한 결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과거 신앙 부흥의 특징이 되었던 성령의 심오하고 영속적인 역사를 거의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바라봄으로 변화된다. 하나님의 품성의 완전함과 거룩함에 대한 원칙이 무시되고, 사람의 마음이 인간의 교훈과 이론에 사로잡힐 때 교회는 경건의 힘을 잃게 된다. 하나님의 율법이 다시 그 정당한 위치를 회복할 때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초기 교회의 믿음과 경건의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