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스위스에 비친 복음의 빛
루터가 작센의 한 광부의 집에서 태어난 지 몇 주일 후에 울리히 츠빙글리(Ulric Zwingli)가 알프스 산중에 있는 한 목자의 오막살이에서 출생하였다. 장엄한 천연계의 품속에서 자라며 그의 마음은 일찍부터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는 할머니 곁에서 교회의 전설과 이야기들 속에 포함된 귀중한 성경 말씀을 들었다.
그는 13세 때 당시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가 있는 베른(Bern)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탁발 수도승들이 그를 수도원으로 끌어들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개입을 통하여 그의 아버지는 탁발 수도승들의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아들의 전도유망한 장래가 위태로워진 것을 알고 즉시 집으로 돌아오도록 지시하였다.
츠빙글리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왔으나 고향의 산골은 그에게 만족을 줄 수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학업을 위해 다시 바젤(Basel)로 갔다. 그는 바로 이때 값없이 얻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곳의 교사였던 비템바흐(Wittembach)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던 중에 성경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룩한 빛이 그에게 배우는 학생들의 마음에도 비춰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을 속량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진리는 츠빙글리에게 밝아 오는 새벽의 첫 광선과도 같았다.
얼마 후에 츠빙글리는 바젤을 떠나 평생의 사업에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의 최초의 일터는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알프스의 교구였다. 그는 신부로 서품을 받고 “온 마음을 다하여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성경을 탐구할수록 성경의 진리와 로마 교회의 거짓 가르침에 대한 차이를 뚜렷이 보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완전하고 오류가 없는 유일한 표준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성경의 의미를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또한 성령의 도움을 간구하였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빛을 달라고 간구하였으며 그때부터 더욱 쉽게 성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츠빙글리가 전한 교리는 루터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스위스의 개혁자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루터가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면 그는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단 한 구절도 루터에게 써 보낸 일이 없고 루터 역시 나에게 그러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한 번도 같이 의논한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교리를 그처럼 일치된 견해로 전한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임을 보여 준다.”
츠빙글리는 1516년에 아인지델른(Einsideln) 수도원의 설교자로 초청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로마의 부패를 더욱 잘 볼 수 있었고, 고향 알프스 지역을 넘어 멀리까지 개혁자로서의 감화를 끼치게 되었다.
아인지델른의 명물은 동정녀 마리아상이었는데 그것이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수도원 입구에는 “이곳에서 완전한 속죄를 얻을 수 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스위스 국내는 물론 멀리 프랑스와 독일에서까지 많은 군중이 이곳을 찾아왔다. 츠빙글리는 이때 미신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전파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말하였다. “세상의 어떤 곳보다 이 성전에만 하나님이 더 크게 역사하고 계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거주하는 나라가 어디든지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계시며, 여러분의 소원에 귀를 기울이신다. …여러분은 고행, 먼 길의 순례, 헌물, 성상(聖像), 동정녀 마리아와 성도들의 기도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번쩍거리는 두건, 말끔하게 밀어 버린 머리, 치렁치렁 끌리는 옷, 금박으로 아로새긴 덧신 등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이 모든 믿는 자들의 죗값을 영원히 지불한 희생 제물이시다.”
이런 설교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괴로운 여행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어진 용서를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로마 교회가 지시해 준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만족하게 여겼다. 마음의 정결을 구하는 것보다 교황과 신부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탁하는 것이 더 쉬웠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로마 교회의 의식들을 지킴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믿음으로 구주의 피를 그들의 속죄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받은 소중한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진리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퍼졌으며, 그 결과 마리아상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의 수가 크게 줄었다. 따라서 헌금의 액수도 감소하였으며 거기서 지출되는 츠빙글리의 봉급도 감소하였다. 그러나 미신의 세력이 깨어지는 것을 보며 그는 기뻐했다.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취리히로 부름 받은 츠빙글리
3년 후에 츠빙글리는 취리히(Zurich) 대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취리히는 그 당시 스위스 연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므로 여기서 발하는 영향력은 멀리까지 미칠 수 있었다. 그를 취리히로 초청한 교회 관계자들이 츠빙글리의 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그대는 교회의 수입을 얻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가장 적은 액수의 헌금이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병자들이 드리는 헌금이나 미사와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할 때 드려지는 모든 헌금으로 교회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의식을 행하는 것과 설교, 교인들을 돌보는 것 등은 대리자에게 위임할 수 있으며 특히 설교는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할 수 있을 것이다.”
츠빙글리는 이런 책임들에 관하여 들은 후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매우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가려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태복음 전부를 설교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독생자를 높이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일할 것이며, 그들이 참신앙 안에서 자라 가도록 돕는 일에 헌신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왔다. 그는 복음서를 펴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과 죽음에 대한 영감적인 이야기를 읽어 주고 설명해 주는 것으로 그의 봉사를 시작하였다. “나는 참된 구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로 여러분을 인도하길 간절히 원합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정치가들과 학자들, 기술자와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의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깊은 흥미를 가지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값없이 얻는 구원을 전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의 죄악과 부패를 두려움 없이 책망하였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말하였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를 애굽의 암흑에서 인도해 낼 우리의 모세다.”
얼마 후에 반대가 일어났다. 수도승들은 그의 사업을 방해하고 그를 조롱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그를 모욕하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이 모든 일을 잘 견뎌 냈다.
하나님이 무지와 미신의 속박을 깨뜨리고자 준비하고 계시는 바로 그때 사탄은 사람들을 암흑 속에 가두어 두고 그 속박을 더욱 굳게 하고자 하였다. 로마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에서 거래소를 개설하여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였다. 모든 죄는 그 값이 정해져 있었으며, 교회의 금고만 채워 준다면 사람들은 마음대로 범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로마 교회는 죄를 짓도록 허용해 줌으로 교회의 수입을 증가시켰고, 개혁자들은 죄를 정죄하고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과 구원자로 소개하였다.
스위스에서의 면죄부 판매
독일에서는 면죄부 판매가 테첼이라는 악명 높은 사람을 통하여 행해졌다. 스위스에서는 그 일이 이탈리아의 수도승 삼손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삼손은 이미 독일과 스위스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 교황의 금고를 채웠었다. 그는 스위스를 순회하면서 많은 군중을 모았는데 가난한 농민들로부터는 그들이 애써 모은 적은 돈을 빼내고자 하였고 부요한 사람들에게는 거액의 금전을 요구하였다. 개혁자는 즉시 그를 반대하기 위해 나섰다. 그 탁발 수도승의 거짓을 폭로하는 일에 츠빙글리가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그는 다른 지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며 열정적으로 설교하였다. 삼손은 모략을 써서 다른 지역으로 들어갔으나 한 장의 면죄부도 팔지 못하고 곧 스위스를 떠났다.
1519년 전염병이 스위스 전 지역을 휩쓸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 전에 사 둔 면죄부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확실한 신앙의 토대를 갈망하게 되었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는 병에 걸려 거의 회복할 가망이 없을 만큼 위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츠빙글리는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으며 죄의 값을 온전히 치르신 주님을 신뢰하였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회복되자 그는 이전보다 더 큰 열성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다. 병든 사람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살펴 온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욱 깊이 복음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복음의 진리를 한층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고 복음의 새롭게 하는 능력을 깊이 체험하였다.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원한 속량으로 우리를 사셨다.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영원한 희생이요 우리를 치료하는 영원한 효력이 된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한다. …하나님을 믿을 때 사람들은 선한 일을 행하려는 열정을 갖게 된다.”
개혁 사업은 취리히에서 서서히 토대를 마련해 가고 있었다. 원수들은 놀라서 필사적으로 이 일을 반대하였다. 이단의 교사를 침묵시키고자 츠빙글리를 향한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콘스탄스의 감독은 세 사람의 사절을 취리히 의회로 파견하여 츠빙글리가 교회의 법규를 범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침으로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고소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권위가 무시당하면 무정부 상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런데 의회가 츠빙글리에 대한 조처를 취하길 거절하였으므로 로마는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였다. 개혁자는 원수들의 음모를 알아채고 이렇게 외쳤다. “공격해 보라. 우뚝 솟은 절벽이 그 아래 부딪히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로마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은 그들이 박멸하고자 하는 복음 사업을 오히려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진리는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독일에서 개혁 사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루터의 행방불명으로 한때 낙담했으나 스위스에서의 복음의 진전 소식을 듣고 다시 용기를 얻었다. 취리히에서 개혁 사업이 정착되면서 범죄는 줄어들었고 사회는 질서를 회복하게 되었다.
로마 교회 대표자들과의 토론
독일에서 진행되는 루터의 운동을 진압하는 데 있어서 박해가 별반 효과가 없음을 확인한 교황의 지지자들은 츠빙글리와는 토론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토론할 장소뿐 아니라 토론자들을 판정할 심판자들까지 자신들이 선택함으로 확실하게 승리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그들은 츠빙글리가 일단 자신들의 세력하에 들어오기만 하면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하였다.
토론회는 바덴(Baden)에서 갖기로 하였다. 취리히 의회는 교황청의 계획을 의심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교황청 교구에서 화형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목사를 이와 같은 위험에 빠지게 할 수는 없었다. 진리를 위하여 흘린 순교자의 피가 채 마르지 않은 바덴으로 가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에콜람파디우스(Ecolampadius)와 할러(Haller)가 개혁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고 많은 학자와 주교들의 지지를 받는 에크(Eck) 박사가 로마 교회 측의 대표로 나왔다.
서기는 전부 로마 교회 측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그 외의 사람은 필기를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이를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럴지라도 토론장에 출석한 한 학생이 매일 저녁 그날 있었던 토론에 관한 기록을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다시 다른 두 학생을 통해 에콜람파디우스의 편지와 함께 날마다 취리히에 있는 츠빙글리에게 전달되었다. 츠빙글리는 거기에 대해 적절한 조언을 담아서 회답하였다. 도시의 문을 지키는 파수꾼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가금류를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들어갔고 아무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뮈코니우스(Myconiu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츠빙글리는 명상과 철야 기도와 바덴으로 보내는 회신을 통하여 자신이 직접 원수들과 상대하여 토론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일을 하였다.”
로마 교회의 대표자들은 번쩍거리는 보석으로 장식한 값비싼 옷을 입고 바덴으로 왔다. 그들의 식탁에는 값진 포도주와 온갖 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개혁자들의 음식은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에 그들은 식탁에 오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에콜람파디우스가 머문 여관집 주인은 때때로 방 안에 있는 그를 감시하였다. 그 주인은 늘 연구하고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고 이 이단자가 적어도 “매우 경건한 사람”이라고 보고했다.
회의장에서 “에크는 화려하게 장식된 연단으로 거만하게 올라갔으나 겸손한 에콜람파디우스는 검소한 의복을 입고 에크의 맞은편에 놓여 있는 초라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에크는 소리를 지르면서 계속하여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로마 교회의 신앙을 옹호하는 데 성공하면 막대한 보상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토론에 실패하면 조롱과 모욕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에콜람파디우스는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고 신중한 태도로 토론에 임했다. 비록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를 가졌지만 그는 유능하고 확고부동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성경을 굳게 고수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스위스에서는 헌법에 부합하지 않는 한 관습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 성경은 우리의 헌법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제시된 개혁자의 조용하고 분명한 논증은 에크의 거만하고 시끄러운 억지 주장에 불쾌함을 느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토론은 18일간 계속되었다. 그 토론이 마칠 때 로마 교회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토론자들 대부분은 로마 교회 편이었다. 의회는 개혁파의 패배를 선언하고 그들과 츠빙글리에게 파문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그 토론의 결과로 개혁 사업은 더욱 강하게 추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주요 도시 베른과 바젤은 개혁 사업을 지지하기로 선언하였다.
